고택소개

자연을 음미하며, 풍류를 논했던 선비의 삶을 따라가보십시오.

옥연정사 안내

430년 고택에서 느껴보는 선비문화와 정신

대한민국 중요민속자료 88호. 국보 132호 징비록의 산실

2010년 8월 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옥연정사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서애 선생이 거처하던 가옥이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대가족의 살림과 사당이 있는 종택(宗宅)과는 다른 서애 선생만의
학문과 만남의 독립 공간이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스스로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랄까?
배를 타고 오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절벽 끝에 집을 지었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임진왜란을 어렵게 치룬 그의 삶과 모습, 생각과 인생, 분위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류성룡 선생은 탄홍스님의 도움을 받아 옥연정사를 마련한 다음 이 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옥연서당기」로 남겼다.

그는 「옥연서당기」에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부딪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라고 적고 있다.
또 스스로를 “고라니의 성품은 산야에 알맞지 성시(城市)에 맞는 동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권위적인 왕조, 권력싸움에서 심한 시달림을 겪은 한 학자의 모습이 진하게 느껴진다.

<옥연서당기 참고>

옥연정사

서쪽 절벽에서 찍은 사진으로 간죽문으로 나가 절벽의 좁은 길을 따라가면 겸암정사에 도달할 수 있는 층길이 있는데 지금은 일반인들이 다니기에 위험하여 폐쇄되었다.

玉淵精舍(옥연정사)를 방문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광덕교를 지나 좌회전하여 약500m 정도 가면 화천서원과 주차장이 있다.
여기서 화천서원 왼쪽으로 나와있는 길을 담벼락을 따라 계속 아래로 내려가면 옥연정사 주차장을 찾을 수 있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1576(선조9년) 집 짓기를 시작한지 10년만인 1586년 완공된다.
서애선생의 나이 45세 때이다. 집을 완공한 6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誕弘)이란 스님이
그 뜻을 알고 건축을 맡고 재력을 부담하겠다고 자원하여 완공되었다.

1605년(선조38년)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의 살림집 삼칸초옥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임진난을 회고하여 징비록(국보 132호)을 저술하였다.

옥연정사

하회에서 바라본 옥연정사 / 옥연정사에서 바라본 하회

서애 선생은 호를 서애(西厓:서쪽 벼랑)로 짓고 마을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외로운 ‘고라니의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세심재(洗心齋)
서당채의 이름이 세심재(洗心齋)이다.
주역계사편 중 의혹종사어사 이서기만일이(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 ;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루 감록헌은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 물 구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감록헌 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좌우 방 1칸이 있으며 서애선생께서 서당으로 쓰신 곳이다.

세심재
세심재 - 마음을 닦는 곳, 서애 선생께서 서당으로 사용하시던 곳이다

원락재(遠樂齋)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원락재(遠樂齋)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논어(論語)중 '이른바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아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2칸 마루 애오헌은 도연명의 시에 '吾亦愛吾廬(오역애오려),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 한 시어에서 따 온 것이다.서애 선생께서 이 방에 기거를 하시며 징비록을 서술하셨다.

원락재
원락재 - 친구가 먼 곳으로부터 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