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제방 지형 택한 풍산 류씨…600년 집성촌 번성의 토대

부용대 절벽 위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전경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하회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풍수적 경관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값진 곳이다. 그래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전통마을의 쌍두마차로 불린다.

양동마을은 주요 가옥들이 산 능선을 타고 있어 산과 연관성이 크다면, 하회마을은 물이 마을 특성을 규정짓는다. 낙동강의 너른 물줄기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 전체를 동쪽과 남쪽, 서쪽 세 방향으로 감싸고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물돌이(하회, 河回)’다.

당연히 풍수 호사가들 사이에 약방의 감초격으로 거론되어 왔다. 산과 물이 서로 어우러져 있어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으로 불렸다. 또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모습이라 해서 연화부수(蓮花浮水)형, 배가 떠다니는 형상을 닮았다 해서 행주(行舟)형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지리적 관점에서 하회마을은 곡류하천 지형의 전형이다. 하천은 구불구불하게 흘러가며 주변 지형을 깎아 내거나(침식) 여러 쇄설물을 쌓는(퇴적) 작용을 한다. 이때, 하천이 감아 도는 안쪽을 퇴적사면(point bar)이라 한다. 통상 이곳은 홍수의 위험이 적고 장기적으로 땅의 면적이 조금씩 늘어나는 지역이므로 취락이 형성된다.

하천이 감아 도는 바깥쪽은 공격사면이 된다. 이곳은 물살이 빨라 침식작용이 강해 바위절벽(하식애)과 소(沼) 지형이 형성된다. 통상 풍광이 좋아 전통적으로 정자(亭子) 등의 학문연구 및 휴식(遊息) 공간 건축들이 들어섰다.

하회마을 또한 그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퇴적사면에 마을이 들어섰고, 반대편 공격사면에는 부용대 바위절벽이 있다. 부용대 쪽 풍광이 좋은 곳에는 겸암정사와 옥연정사가 있다. 특히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만년에 ‘징비록’을 저술한 장소이기도 하다.

마을과 부용대 사이에는 하천변을 따라 길게 소나무 숲(만송림)이 조성되어 있다. 소나무 숲의 쓰임새는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제방 둑을 보강해 홍수를 방지한다. 또 마을의 북서쪽에 있어 겨울바람을 막아준다. 땔감 공급처 기능도 가능하다.

더불어 풍수의 관점에서 보기 싫은 것을 가리는 ‘가림막(차폐)’ 기능도 한다. 전통 고택들은 반듯하고 단정한 봉우리가 잘 보이도록 건물이나 대문을 배치했다. 반대로 터에서 거칠고 흉한 바위나 산이 보일 때는 건물이나 나무로 가렸다. 이곳 또한 마을에서 거친 부용대 바위절벽이 안 보이도록 숲으로 가린 것이다.

한편,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집성촌으로 600년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나 사실 그 이전에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

풍산 류씨 입향조인 류종혜가 13세기 입향 할 당시에 마을 주산(主山)인 화산(花山) 자락에는 타성 집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에 류종혜는 물가 가까운 지금의 양진당 자리에 터를 잡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다. 마지막에 들어온 류씨만 번성하고 타성 집안은 다 떠나가고 마을이 사라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타성 집안들이 일반적인 배산임수 터 잡이 방식으로 화산 자락에 자리 잡고도 번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험하게 보이는 물가 가까이에 터를 잡은 풍산 류씨 가문만 번성한 까닭은 무엇일까? 열쇠는 마을의 지리적 특성에 있다.

하회마을은 지리적으로 범람원 지형이다. 범람원 지형은 자연제방(natural levee)과 배후습지(back swamp)로 이루어진다.

홍수 시 하도 가까이는 비교적 입자가 큰 자갈이나 모래가 퇴적되어 주변보다 고도가 높아진 자연제방이 형성된다. 이곳은 배수가 양호하고 침수 위험이 적어 통상 취락이 들어선다. 풍산 류씨 집안이 바로 자연제방 지형에 터를 잡았던 것이다.

자연제방 뒤쪽은 배후습지 지형이다. 이곳은 입자가 작은 점토 등이 퇴적되어 배수가 불량하다. 또 상대적으로 토사 유입량이 적어 고도도 낮다. 그래서 통상 습지로 남거나 농경지로 활용될 뿐 취락조건이 불리한 지형이다. 타성 집안이 바로 이 배후습지에 먼저 터를 잡았던 것이다.

풍수의 관점에서도 타성 집안이 자리 잡은 곳은 산(龍)이 머물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는 ‘과룡(過龍)’처에 불과하다. 하회마을에 가기 전, 건너편 부용대에서 보면 마을 전체가 별다른 지형의 기복(起伏)이 없는 평탄지로 보인다.
 

하회마을의 풍수적 중심(穴)인 양진당과 충효당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모습

그러나 막상 마을에 들어서면 완전히 달라진다.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마을 입구로 조금 걸어 와 왼쪽(남쪽)을 본다. 화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來龍)가 수백 미터를 달려가 마을에서 다시 솟구친다.

내룡의 높이 또한 수 미터는 족히 되는 평강룡(平崗龍)이다. 멀리서 보면 평탄지인 것이 실제로 제법 높은 평강룡(平崗龍)이 마을을 향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타성 집안이 자리 잡았던 곳이 바로 내룡이 계속 뻗어 가는 중간지점(과룡처)이다. 풍수적으로 별다른 귀(貴)나 부(富)를 기대할 수 없는 지역이다.

이제 하회마을의 풍수적 중심 공간(穴)인 양진당과 충효당을 살펴보자. 먼저 양진당을 보자. 양진당은 풍산 류씨 입향조 류종혜가 처음 터 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풍산 류씨 종가다.

마을로 이어지는 용(龍)은 수 미터 둔덕 높이의 평강룡의 형태다. 먼 거리를 뻗어 오는 동안 긴장감이 떨어질 즈음이면 작은 봉우리를 세우며 기운을 다잡는다. 북서쪽으로 뻗어 오던 용이 마을 가운데 삼신당신목에 이르러 불현듯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어 땅기운은 방향을 90°정도 완전히 틀어(횡룡입수) 양진당으로 들어간다.

이때, 풍수에서 횡룡입수 형태일 경우 땅기운이 그 방향을 완전히 틀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주는 산이나 바위(귀성, 鬼星)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빈연정사 일대의 땅이 하고 있다.

빈연정사 일대의 땅 모양이 두툼하게 붙어 땅기운이 양진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준다. 그리고 남은 기운(餘氣)이 선익과 백호가 되어 양진당에서의 혈 맺음을 도와주고 기운 누설을 막아주고 있다.

특히 양진당 대문 너머로는 반듯한 목형(木形)의 마늘봉이 잡힌다. 최근에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양진당 대문에서 마늘봉을 배경으로 ‘점프샷’을 찍는 것이 유행이라 한다.

하회마을의 또 하나의 풍수적 중심에는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이 있다. 일반적으로 충효당은 류성룡의 생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출생지는 외가인 의성 사촌마을이다. 당시는 아기를 가진 산모가 친정에서 몸을 푸는 관습이 있었다. 이에 그의 모친도 외가에서 몸을 푼 것이다.

그러나 풍수에서는 출생지 못지않게, 잉태한 곳을 중요하게 여긴다. 충효당 또한 서애가 잉태하고 어린 시절 생활했던 곳이기에 풍수적 고려 가치가 있는 곳이다. 단 서애가 살던 당시에는 단출한 삼간초옥(三間草屋)이었고, 지금의 건물은 서애 사후에 후손들이 증축한 것이라 한다.

충효당의 특징은 양진당의 풍수 지형과 반대다. 양진당은 마지막에 반시계 방향(右旋)으로 용이 멈추고 혈을 맺음으로써 백호가 발달했다. 건물의 방향 또한 대체로 남향이 자연스럽다. 충효당은 마지막에 시계 방향(左旋)으로 용이 멈추고 혈을 맺음으로써 청룡이 발달했다. 그래서 건물 방향 또한 대체로 서향이 되었다.

둘의 터 잡이 모습은 얼른 보면 규칙이 없고 삐딱하다. 그러나 풍수가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하나의 줄기에서 갈라진 나뭇가지에 열매가 하나씩 매달린 모습이다. 그런데 그 열매가 각기 따로 놀지 않고 서로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는 듯하다. 실로 지형에 맞춘 정확한 터 잡이와 건물 배치의 모습에 감탄이 나온다.

박성대 대구가톨릭대 지리학과 대학원 겸임교수·풍수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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