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옥연정사

Ogyeonjeongsa
옥연정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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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정사는 서애(西厓)(1542~1607) 선생께서 임진왜란의 전후사정을 기록한 징비록(국보132호)을 쓰셨던 역사의 현장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西厓)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여기 옥연정사에서 기록해 간다.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 「징비록(懲毖錄)」으로 하였다.

가장 종합적인 임진왜란 기록
1592년, 조선 선조 25년 4월 13일 바다를 뒤덮을 듯 수많은 왜적의 배가 부산 앞바다로 몰려온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꼽히는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그날의 일을 『조선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의 배가 바다를 덮으며 몰려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그때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조공하러 오는 일본 배라고만 생각하고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진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적은 이미 성에 올랐고, 정발은 혼란 중에 죽었다. 다음 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동래 부사 송상현이 죽었다.”
징비록 사진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 서애(西厓)(1542~1607)선생이
임진왜란때의 상황을 벼슬을 떠나 귀향한 후에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징비록(懲毖錄)」으로 하였다.
징비록 사진
징비록 : 국보 제132호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선생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며 우리나라를 폐허나 다름없게 짓밟아 놓았다. 위의 기록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 군대는 밀려드는 왜적 앞에 힘없이 무너져 갔다. 왜적은 별 달리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 않고 경상도를 지나 충청도, 경기도로 밀고 올라와 불과 두 달 정도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차지했다. 그동안 각 지방을 지키던 우리 관리들은 소문만 듣고도 허둥지둥 달아나고 군사들도 제 한몸 지키느라 재대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지나 북쪽 땅 끝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임금과 갈라져 함경도 쪽으로 피난을 갔던 두 왕자는 적의 포로가 되었다. 백성들은 왜적의 총칼에 무참히 짓밟히고 가족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더러는 왜적의 협박에 굴복하여 혹은 자발적으로 왜적의 길잡이가 되거나 첩자가 되기도 했다.

『징비록』은 바로 그 임진왜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데로 서술한 전쟁기록이다.
하나의 사건이라도 누가 어떤 위치에서 보고 어떤 관점에서 썼느냐에 따라 그 기록의 내용과 가치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징비록』의 지은이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위 관직에 있었고, 전쟁중에는 최고 관직인 영의정으로서 또 전시 총 사령관격인 도체찰사로서 전쟁 수행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때로는 조정의 높은 관리로서 장수 임명에 관여하고 때로는 전쟁터를 누비면서 전략을 세우고 때로는 명나라 장수의 접대를 맡아 명나라 군대와 우리 군대의 작전 계획을 의논하는 등 전쟁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만큼 전쟁을 누구보다 대국적이고 종합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내외 문헌 중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히는 까닭이다.

부끄러움과 반성의 기록
류성룡은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이다. 선생이 그를 처음 보고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라고 감탄했을 정도로 류성룡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명석했다. 학문적으로도 뛰어났지만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한 수 위였던 듯하다. 그는 여러 사람이 기대했던 대로 과거에 급제한 뒤 승승장구 중요한 관직들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위기 앞에 온 몸으로 맞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에 정적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경상도 하회로 돌아간다. 나중에 다시 관직이 복직되고 임금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불우한 만년을 보낸다. 『징비록』은 이 시기에 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만년의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서 이 책을 썼거나 혹은 모함당한 분을 품고 쓴 것은 아니다.

저자 서문에 보이듯이 『징비록』은 “나 같이 못난 사람이 난리가 나고 국정의 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국가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잡지 못했다.” 는 부끄러움과 “초야(草野)에서나마 못내 국가에 충성을 바치려는 나의 뜻을 내보이고, 또 못난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아무 공도 이루지 못한 나의 죄를 드러내려는” 반성의 기록이다. 그래서 책 제목도 “지난 전쟁을 돌아보며 반성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고 대비하려 한다” 는 뜻에서 『징비록』이라고 붙인 것이다.

『징비록』은 본래 임진왜란이 끝난 뒤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집필한 회고록 형태의 기록 2권, 전쟁 중에 임금에게 올린 보고, 건의서, 관계기관이나 책임자들에게 보낸 지시, 전달문 등의 공문서 모음인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 14권과 11항목의 녹후잡기로 이루어졌다. 서애 선생이 쓴 친필 『징비록』은 경상북도 안동 풍천면에 있는 서애의 종손 집에 보관되어 내려왔고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하는 『징비록』으로는 초고본인 『원본 징비록』이 있고, 목판으로 간행된 책으로 2권 본과 16권 본이 있다. 2권 본은 『징비록 권 1, 2』와 『녹후잡기』로 구성되어 있고, 16권 본에는 앞에 설명한 대로 2권 본에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이 함께 묶여있다.

회고록 형태의 『징비록 권 1, 2』에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 예사롭지 않았던 일본사신들의 언행을 시작으로 전쟁 초반 각 성과 진이 차례로 무너져 가는 상황, 임금의 피난 실상, 조정 신하들의 행태, 여러 장수의 능력, 각지의 의병활동, 백성의 참상, 명나라와 관계, 명나라가 구원병을 파견하면서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강화과정, 그리고 이순신의 전사까지 67개 항목이 대채로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녹후잡기』를 포함한 모두 78개 항목의 사실은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 영광보다는 치욕, 밝은 면 보다는 어두운 면, 그리고 승인보다는 비판쪽에 치우쳐 있다.

그러면서도 지은이는 최대한 중립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사실 만을 기록하고 있다.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 판단은 물론이고 굴욕감, 안타까움, 분노같은 인간적인 감정도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 그런데도 모든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지은이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일 것이다.

한문으로 된 『징비록 1.2』와 『녹후잡기』의 원문은 모두 합쳐 글자 수가 4만자 남짓이다. 7년의 기록치고는 몹시 짧다고 하겠다. 하지만 내용은 알차고 풍부하다. 그 짧은 글 속에 사건의 전후 사정을 핵심만 짚어 분명하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그러면서도 문장은 유창하다. 이 점에서 『징비록』은 사료로서의 가치에다 문학적 가치를 더하게 된다.

참혹했던 전쟁도 끝났고, 영욕이 교차한 관직에서도 진즉에 떠났다. 쓸쓸하기도 했으려니와 한편으로 홀가분하기도 했을까? 죽음이 멀지 않은 늙은 몸으로서 지난 전쟁을 돌아보며 나라를 생각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담담히 써내려간 이 기록은 400년 세월을 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칫 방심하면 언제 또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국가적 재앙에 철저히 대비할 것을 당부했던 그가 고르고 골라 책 제목으로 선택한 두 글자가 ‘징(懲)’ 과 ‘비(毖)’였다.

글 / 징비록 역자 이동환님의 글에서 발췌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