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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당 당호에 관한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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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수권
댓글 0건 조회 5,762회 작성일 14-12-29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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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孝堂 堂號에 관한 想念


안동 하회마을에 위치한 서애종가 종택(보물 제414호)의 당호(堂號)인 '충효당(忠孝堂)'은 평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씀을 자주하셨던 서애 류성룡 대감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서애 대감의 증손인 눌재(訥齋) 류의하(柳宜河) 선생께서 지은 것이라 한다. 나는 이 말의 의미가 유학에서 으레 언급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매우 의미심장하고 엄중한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하여 이런 저런 상념을 가져 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오랜 전란 속에 학살과 유랑과 기아의 참혹한 현실을 겪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적이 어디 축복이었겠는가. 치유될 수 없는 피폐한 몸과 마음으로 폐허에 남겨져 절망적 현실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죽음보다 더 한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런 시기의 민심을 일컬어 흔히 '흉흉(洶洶)하다'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사실 '술렁여 어수선하다'는 것에 불과하여 충분하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 전쟁이 임박했던 때라면 모를까 7년 전란의 시작과 끝은 술렁여 어수선한 정도가 아니라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생지옥 그 자체였을 터이니 말이다.

 

당시의 실상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만, 민심에 흉악(凶惡)이 자리했을 것임을 짐작해 본다. 무도(無道)한 자라면 더욱 포악을 일삼았을 것이요, 본디 선량한 자라도 살기 위해 법과 도리를 벗어나는 일이 빈번했을 것이니, 우리 역사에 민초(民草)가 겪은 고충이 어디 이때 뿐이었겠는가만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인정(人情)과 윤리(倫理)를 온전히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왜적(倭敵)이 원수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배우지 못해 어리석은 자라도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왕과 부패한 지배계층의 잘못을 알았을 것이다. 실제 백성들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이에 분노하여 궁궐에 불을 질렀으니, 전란의 끝에 남은 것은 역심(逆心)이라 해도 좋을 만큼 서늘하게 홀맺힌 원망(怨望)과 원한(怨恨)이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이 당시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버림 받은 채 스스로 살아 남기 위해 죽기로 싸운 백성들의 마음에서 어찌 충심을 기대할 것이며, 또한 이미 참혹하게 부모와 자식을 잃거나 극궁(極窮)과 기아(飢餓)와 착취(搾取)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찌 (도움이 아닌) 효심을 한가로이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극단적 상황에서 유학의 윤리덕목은 뜬구름과 같거나 질곡(桎梏)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없었던 시대이므로 백성들이 성토를 할 수도 없었겠지만, 진실이 꼭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현된 것이 거짓이고,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실인 경우도 많다. 하물며 그것이 전란의 참혹한 실상과 한 맺힌 민심이라면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 한들 알 수 있을 터인데 이조차 외면했던 것이 당시의 지배계층이었으니 이들이 말하는 충효의 윤리덕목은 한낱 지배이데올로기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나는 다만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그대들을 어이 하나"라는 물음 뿐이라고 한 서애 대감의 탄식과 쓰라린 자책에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은 양심의 울림이 있었음을 확인할 뿐이다.

 

서애 대감께서 말씀하신 충효(忠孝)의 의미는 진정 어떤 것이었을까. 충(忠)의 경우에는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제독이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멋진 말을 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좋은 의미일지언정 그저 오늘날의 영화 관람객들을 위한 맞춤 대사라는 생각이다. 유교사상에서 충은 군왕(=국가)에 대한 것이니 이순신 제독이 자신을 핍박하는 군왕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오히려 그래야 온전한 충이다. 못난 군왕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이 결코 흠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백성을 등한시 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의 대상이 군왕이든 백성이든 오늘날의 국민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들이 대상에만 집착하다 보니 충의 본질적 내용, 즉 우리가 충이라 일컫는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本分)을 다하려는 마음가짐과 그것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고 실행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효(孝)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라는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자신의 친부모에 한정해서 인식하지 않는 것과 같다. 효의 본질은 부모와 같은 어른을 모두 공경하고 정성으로 봉양하려는 마음가짐과 행위인 것이다.

 

어리석은 내가 감히 평가를 한다는 것이 외람된 일이나 만약 서애 대감께서 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그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씀 뿐이었다면 이름 없는 시골 훈장조차 즐겨 언급했을 그 흔한 덕목이 수 백년을 이어져 지금까지 내려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서애 대감은 권세와 부귀를 탐하는 지배계층의 도당(徒黨) 안에서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짊어 진 채 마침내 국난을 극복하셨고, 전후(戰後)에는 모두가 전쟁이 끝났다며 없는 공(功)도 거짓으로 내세우는 판국에 도리어 파직(罷職)과 삭탈관작(削奪官爵)의 수모를 겪으면서도, 이에 아랑곳 없이 홀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비극이 끝나지 않았음을 인식하여 끝까지 뼈 아프게 되새겨 징비록을 집필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하셨다. 그렇게 본분을 다하는 것이 충이었고 충을 다하는 것이 곧 효라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그리 생각을 해본다.

 

충효라 일컫는 그 마음가짐을 오롯이 실천하셨고 또한 그 가르침을 엄중하게 새기고 받들어 온 후손과 후학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에게도 감동 어린 귀감으로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애 대감께서 임종하실 무렵 남기셨다는 시를 옮긴다.

 

이른 새벽에 홀로 앉아 시를 읽으며 그 옛날 새 소리와 나무 베는 소리를 상상해본다.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럽다" 하시는 말씀에 대감의 인품을 사모하게 되고,
"충효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하심은 또한 얼마나 엄하고도 자상한 가르침인가.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라
충효 이외에 달리 할 일은 없느니라

 

林間一鳥啼不息
門外丁丁聞伐木
一氣聚散亦偶然
只恨平生多愧怍
勉爾子孫須愼旃
忠孝之外無事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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